교수에서 7개 회사 거느린 CEO로
5년간 한국에서 경험쌓고 창업…건강산업단지 만드는 게 꿈




한국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달러를 바꿀 때면 한국 돈을 먼저 내주셨고 보증도 없이 물건을 공급해 주셨죠. 사업을 시작했을 땐 신용장도 개설할 줄 몰랐어요.”
중 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의 조선족(중국 교포) 기업인 대천건강산업기구 천옥금(40) 동사장은 “한국인과 마주치면 친척을 만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말씨는 한국 사람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는 “한국에 5년 가 있는 동안 북한 말씨를 고쳤다”고 했다.
올해 불혹인 천 동사장은 경상북도에서 발원한 조선족이다. 아버지의 고향은 구미, 어머니 고향은 안동이다.
하 얼빈상업대학을 졸업한 그는 5년 동안 모교에서 회계학과 기업관리를 가르쳤다. 모교에 남은 것은 그가 졸업시험에서 1등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농촌 출신(호구)이라 대학을 마친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던 그는 하얼빈에 남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결국 모교의 유일한 조선족 교수가 됐다.
도시에 남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는 상아탑에 갇혀 지내고 싶지 않았다. 그의 꿈은 전공을 살려 기업가나 은행가가 되는 것이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대학을 마칠 때 동기 중 유일하게 주산 특1급을 딴 그는 대학에 몸 담고 있는 동안 중국상업계통계산기술경시대회에 나가 6등을 했다.
헤이룽장 TV가 이 조선족 여 교수의 입상 소식을 뉴스로 전했다. 하얼빈시의 한 간부가 이 방송을 보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한국에 주재할 공무원을 뽑는데 한국말을 하느냐”고 물었다. 천 교수는 이렇게 해서 한국어 테스트 등 시험을 보고 공무원이 됐다.
한•중 수교가 이뤄진 1992년 그는 중국 하얼빈시 정부 공무원 신분으로 한국땅을 밟았다. 한국에 IMF 체제가 들어선 97년 12월까지 주재하는 동안 그는 중국 대사관 모임 등을 통해 한국 기업인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한국 분들이 많이 도와주셨죠. 저더러 중국에 돌아가면 한국 상품을 한번 팔아보라면서 물건을 그냥 대주셨으니까요. 제가 본래 인덕이 많아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2개 분량의 생활용품과 화장품을 한국 기업인에게서 무료로 공급받은 그는 하얼빈에 상점을 차렸다. 2001년엔 한국산 생활•혼수 용품 도소매 매장을 냈다.
이렇게 번 돈으로 그 이듬해 대천유통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드디어 기업인의 꿈을 이룬 것이다. 대천이란 회사 이름은 자신의 성 천(千)에 큰 대(大) 자를 얹어 지었다. 상표는 ‘大千’이라고 쓴 띠를 두른 지구의 모습이다.
그 는 7개 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4개는 주식회사, 3개는 개인회사다. 대천건강산업기구는 건강관리사를 양성하는 일종의 직업학교다. 헤이룽장성이 70%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고 강사진은 한의대 교수로 구성돼 있다. 건강관리사는 병원•위생학교 등 위생방역 부문에 종사하는데, 전망이 밝다.
헤이룽장대천건강식품유한회사는 버섯 종균 회사로 농가에 버섯의 종균을 나눠주고 이들이 재배한 버섯을 가공해 수출한다. 농가 1만3000호에 일감을 제공하고 버섯 재배법에 대한 교육도 하고 있어 중앙 정부와 성•시 정부에서 수천만 위안의 정책자금을 지원받았다.
이 같은 정부 지원금 액수는 헤이룽장성 기업이 받은 것 중 가장 큰 규모. 수확한 버섯은 건조만 해서 팔기도 하고 반제품 상태로 싱가포르에 수출하거나 음료수•캡슐로 만들어 팔기도 한다. 농민들에게 버섯 재배법을 가르치는 교육 센터는 별도 법인.
“이 회사는 이윤만 추구하지 않습니다. 농가에 원균을 무상 지원하기도 하죠. 그럴 때면 농촌 출신으로서 보람을 느낍니다.”
헤이룽장대천환경보호과학기술유한회사는 한•중 합작 기업으로 아연으로 된 오수처리관을 만든다. 설비 및 기술 투자는 한국 측이, 토지•건물은 천 동사장이 현물투자했다. 천 동사장이 51%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이 회사를 한국과의 합작기업 성공 모델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실패한 합작기업이 많다 보니 서로 상대방을 원망하는 일이 잦습니다. 이 회사를 잘 키워 두 나라 간 합작의 성공 모델로 제시해 보고 싶어요. 양측에 서로 이득이 되다 보면 성공 케이스로 전파되겠죠.”
헤이룽장북균생물공정유한회사는 79종의 야생 버섯 원균을 배양하는 연구소다. 이 밖에 생활용품을 수입•도매하는 회사, 동아제약이 장쑤성의 쑤저우에서 생산하는 캔 박카스를 판매하는 회사가 있다.
그는 시장 조사를 위해 이탈리아•프랑스 등 26개국에 출장을 다닌다. 출장지에 도착하면 가져간 운동화로 갈아신고 배낭을 메고서 백화점과 건강식품 전문점을 찾아다닌다. 그렇게 모은 샘플이 10박스나 될 때도 있다.

임직원 179명 중 유일한 조선족
그는 천성적으로 낭비를 싫어한다. 그래서 구두쇠 소리도 듣는다. 이면지 사용은 기본. 회사 이름이 인쇄된 용지가 있지만 이면지가 떨어져야 쓸 수 있다. 회사 일로 저녁 접대를 하는 날이면 남은 음식을 싸와 다음날 직원들과 회식한다. 낭비 등으로 회사에 손실을 입혔을 땐 50% 감봉을 각오해야 한다.
천 동사장은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린 시절 그의 집에서는 돼지를 쳤다. 예닐곱 살 때부터 그는 새벽 네다섯 시면 일어나 돼지 풀을 뜯어왔다. 그 시절 동네 사람들이 종자 돼지를 사러 갈 때면 그를 대동했다고 한다.
“제가 고른 돼지들이 돈을 많이 벌어줬거든요. 신기하게 제가 고른 돼지는 병도 안 걸리고 빨리 컸어요. 그래서 동네 할머니들이 저더러 ‘산 꼭대기에 데려가도 잘살 아이’라고 하셨죠.”
그 가 경영하는 회사들은 이직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비결이 뭘까? 우선 보너스를 많이 준다. 설에 300%, 추석과 신정에 각각 100%의 보너스가 지급된다. 그러나 보너스를 제대로 받으려면 근무 평점이 좋아야 한다. 본인과 동료도 평가를 한다. 10점 만점인 근무 평점이 8점이면 기본급밖에 못 받는다. 그의 회사는 또 오너의 친인척이 없다. 가족들이 사무실에 와본 적조차 없다.
좋은 아이디어를 냈거나 마케팅에 크게 기여한 직원에게는 주식을 나눠준다. 그러나 가족에게는 주식을 증여하지 않는다. 그의 회사는 요즘 상장을 준비 중이다.
그 자신 조선족이지만 회사 임직원 179명 중 조선족은 그가 유일하다. 그는 “조선족은 이직률이 높다”고 했다.
“처음엔 교포를 많이 쓰려고 했지만 포기했습니다. 석 달 만에 유학 간다고 그만두고, 반 년 만에 시집간다고 안 나오고, 8개월 만에 한국에 취업 간다고 그만두는 식이죠. 사실 조선족 교포들은 한족에 비해 취업 기회가 많아요.”
그의 꿈은 건강산업단지를 만드는 것이다. 병원, 친환경제품 공장, 건강 관련 연구소가 동거하는 복합단지다. “회사가 잘나가고 있어 3년 후면 실현 가능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 회사는 전망 있는 회사입니다. 회사도, 사장도, 프로그램도 모두 젊죠.”
그는 한국 기업을 유치하려고 하는 중국 정부 측에 “자본•설비 못지않게 생산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한국의 선진 기술을 도입하고 IT 같은 큰 아이템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생활용품 등 작은 것에 눈을 돌리라”고 조언했다.
천 동사장은 쌍용차 체어맨을 탄다. 얼마 전엔 현대 에쿠스로 바꾸기 위해 한국에 주문을 했다. 운명적 친한파인 그는 같은 한민족인 조선족과 한국인이 조화롭게 살아가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