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석 도 (캐나다 밴쿠버•평창)

12살 문맹서 加 최고 식당 재벌 자수성가

  그는 12살이 될 때까지 한글을 읽지 못했다. 무척 가난한 환경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항상 배고픔에 찌들어 살았다. 어릴 때부터 산골에서 농사일과 소 키우고 산에 나무하러 다니며 어려운 소년기를 지냈다. 춥고 굶주린 그러한 처지는 성년이 될 때까지 계속됐다. 이 때문에 나중 고학으로 겨우 대학을 마칠 때까지도 밥을 실컷 먹어봤으면 하는 것이 가장 절실한 소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힘든 성장기를 겪으며 그는 한 가지 삶의 요령을 터득한다. 무슨 일이든 부딪치면 피하지 말고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강인한 정신력이다. 일찍이 형성된 그러한 성격은 한 평생 도전 정신으로 세상을 살게 한다. 일상의 사사건건마다 승부 의식을 안고 그는 오늘까지 성공과 실패를 넘나들며 특이한 인생살이를 겪어온 것이다.
지석도. 59세. 평창 사나이. 그는 한때 밴쿠버 교포사회에서 한인회장 등을 역임하며 최고 유지로서 명성을 날렸다. 또 밴쿠버에서 대형 일본 스시 식당을 여러 개 소유한 식당 재벌(?)로 재력을 과시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모든 재산을 다 잃고 만다. 아예 남에게 비즈니스를 맡겨놓고 수 년동안 자원봉사일 등 돈벌이와는 거리가 먼 일에 신경 쓰다보니 지난 96년 하루아침에 빈 털터리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는 주위 친구들이 조금씩 마련해 준 돈으로 시골 외곽지대로 갔다. 거기서 피땀 흘려 주유소 사업을 일궈 내기 6년. 그는 다시 비즈니스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다. 그리고 최근 밴쿠버로 돌아와 한 쇼핑센터 개발지역에 주유소와 식당 및 가게자리 등을 구입했다. 그로선 마지막 비즈니스 재기의 기회를 보고 있는 참이다.
 지석도는 45년 8월 평창군 미탄면 창리의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다. 2남1녀 중 장남인 그는 틈틈이 한문공부는 했으나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그러나 후에 고교 검정고시에 합격하면서 홀로 고향을 떠난다.
 고향엔 학교가 없어 친척이 있는 광산촌 장성으로가 태백공고에 입학했어요. 그래도 처음부터 운 좋게 5.16 장학금 등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성적이 3년간 항상 3등 이내에 들은 탓도 있지요.
고 달픈 자취생활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주머니에 돈 한푼 있은 적이 없었고 점심을 먹은 기억은 거의 없다. 굶는 게 다반사였다. 대신 성적은 뛰어나 동기들을 가르치며 고교를 졸업한다. 대학생활도 형편이 어렵기는 마찬가지. 서울 답십리에 방 한 칸을 얻어 자취를 하며 한양공대 정밀기계과를 다녔다. 4년간 아르바이트를 했으나 차비를 아끼느라 학교까지 먼길을 내내 걸어 다녔다고 한다.
  그의 주위엔 언제나 친구들이 들끓었다. 그러한 인기로 학교에선 언제나 리더의 위치에 서 있었다. 대학 3년 때는 공대 학생회장에 입후보해 무난히 당선됐다. 그러나 당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잦은 반정부데모를 전개하면서 학교로부터 제적 당한다. 이때는 군대 의무를 위한 장교훈련(ROTC)을 받고 있던 시기다.
 1주일 후 총 학생회에서 들고일어나 다시 복교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학생회장은 그만두는 조건으로 학교측과 합의를 보았지요.
  대학졸업 후 ROTC 장교로 육군 중위로 전역했다. 처음부터 지석도를 아는 주변에선 그의 경우를 기적(?)이라며 화제로 삼았다. 초등교, 중학교도 다니지 못한 그가 시골에서 뒤늦게 검정고시로 고교, 대학졸업과 육군장교까지 됐으니 기특할 수밖에. 오히려 그는 같은 또래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사회에도 진출하고 있었다.
 그는 새한칼라 회사에 입사, 일본 코팔(COPAL) 정밀공업주식회사에 1년간 파견됐다. 이때 일본 연수생으로 1명 뽑는 모집에 850명이 몰렸고 이때 그가 홀로 선발된 것도 기적에 가깝다고 전한다.
 74년 새한칼라는 그 일본회사와 한일합작투자를 하면서 그는 한국 새한 코팔회사의 기술과장이 됐다. 또 그 해 회사사장 중매로 한양여고 교사인 이정숙 씨와 식을 올렸다.
  한일합작회사가 설립되면서 서울 구로공단에 공장을 짓고, 사람 뽑고 할 때 1등 공신노릇을 했지요. 그런데 일본측에서 어느 주임을 부사장으로 서울에 발령내면서부터 문제가 생겼어요. 제가 일본 연수할 때 그는 제 밑에 있던 사람이었는데 상황도 달라졌고 일하기가 무척 힘들어 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불편한 직장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는 무작정 해외직장을 알아보기 위해 서울 캐나다 대사관을 찾았다. 대사관측에선 그의 기술경력을 보고 즉시 독립이민신청을 하라며 그를 받아들였다. 앨버타주 에드몬튼 광산에 직장까지 소개했다. 그는 이민수속이 순조롭게 끝나자 76년 9월 가족과 함께 캐나다 에드몬튼으로 떠난다.
 그러나 약속된 회사를 찾아가니 영어를 못한다고 엔지니어 직종을 주지 않더군요. 그래 잠시 기능공으로 일하다 그만두고 오타와 대학원에 가려고 공부를 했지요.
그는 대학원시험에 합격하고 장학금까지 나왔다. 하지만 둘째가 태어나면서 결국 학업계획을 포기한다. 또 주위에서도 공부보다는 비즈니스로 돈을 버는 게 좋겠다는 충고가 많았다.
 당시는 앨버타주의 오일(석유)붐으로 수도인 에드몬튼의 모든 사업이 아주 활발할 때였다. 미국 석유회사도 에드몬튼에 진출해 있었다. 그는 철공장을 세워 용접트럭을 끌고 다니며 꽤 비즈니스 재미를 보았다한다.
 그러나 에드몬튼에 오일 붐이 끝나고 텍사코 등 미회사도 철수하면서 사업이 안됐어요. 그래서 따뜻한 밴쿠버로 아예 이주했지요.
  밴쿠버에서 그는 잡화점을 비롯해 식당, 크라이슬러 자동차 세일즈맨 등 뭐든지 해냈다고 회상한다. 당시 이민 초창기에 겪은 뼈저린 어려움 때문에 그는 나중 한인회장을 맡아 교포들을 도와야겠다는 결심을 굳게 했다고 말했다. 처음엔 정말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이민생활을 했어요. 그러나 고생 끝에 종업원이 45명되는 일본식당을 운영하며 한때 교포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비즈니스맨으로 지칭되기도 했지요.
 그가 밴쿠버 한인회장이 되면서 많은 일을 해냈다. 숙원사업이던 한인회관(강당에만 약 600명을 수용)을 건립했고, 한인주소록 발간, 한국문화보급, 한국대학 설립 등을 실현했다. 이 때문에 역대 한인회장들 중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로 지금도 교포사회에 회자되고 있다. 특히 6월 29일을 한인의 날(Korean Day)로 선포하면서 밴쿠버 최고 명소인 오피움 극장에서 캐나다 정부요인 등 각계인사 3천명을 초청해 한국문화행사를 벌였을 당시의 감격을 아직도 한인들이 잊지 못한다고 전한다.
 그로 인해 우리 교포들 수십 명이 한국정부로부터 크고 작은 포상을 받았어요. 밴쿠버 한인회관 건립도 한국정부 돈 한푼 안 받고 순수한 밴쿠버 교포들끼리 세운 것 아닙니까(토론토한인회관은 건립 시 한국정부로부터 200만 달러를 기부 받았음.)
 하지만 그가 한인교포봉사 일에 전념하고 있을 동안 타인에게 맡겨놓은 그의 사업은 회복불능의 구렁텅이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는 남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실수로 인정해 모든 사업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6년 후 분연히 다시 일어서고 있다.
 한편 지사장에 따르면 밴쿠버에도 이미 알려진 강원도민 수만 20여명이 된다고 한다. 실상 찾아보면 훨씬 많은 숫자가 되리라 보고 있다. 그는 곧 몇 사람이 주축이 돼 강원도민회를 결성할 계획임을 전했다. 한인회라는 큰물을 떠났으니 이제 도민회라는 작은 물에서 그간 고향을 위해 못 다한 정성을 다하겠다고 밝히면서.